세상이야기

 

군인과 천사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소개할까합니다.  테일러 모리스(Taylor Morris)와 다니엘 켈리(Danielle Kelly)는 10대 학창시절부터 연애를 했습니다. 그렇게 이쁜사랑을 나누고 있을때쯤 잠시 떨어져야하는 일이 생깁니다.

 

 

2012년 23이 된 테일러 모리스는 미군 해군 EOD tech에 자원입대하였습니다. 그 후 아프간 칸다하르로 투입된 그는 미군 특수부대에 배속되어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부대의 최선봉에 서서 통로를 개척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폭발물 처리반으로 파병 중 이었던 테일러 모리스는 금속 탐지기를 들고 전투정찰을 나섰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는 폭발에 휘말리는 순간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발을 딛자마자 알았습니다. 엄청난 폭음을 듣고, 열기를 느꼈어요. 외견상 보이지도 않았고, 탐지기에 소음표식이 잡히지도 않았어요. 내가 밟은 것이 구형 지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동맥이 모두 끊어져서 팔.다리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제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는 전우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테일러는 그 사고로 양팔과 양쪽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지난 10년에 걸친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에 약 2만 4천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이중 1,400명이 전투중 입은 전상으로 인해 팔.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는데요. 이중 4지 절단이라는 중상을 입고도 끝까지 살아남은 이는 여지껏 단 4명에 불과했답니다. 테일러 병장이 5번째라고 합니다.
 

 

 

 

참변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몸을 떨며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낼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고향의 애인 다니엘 켈리였습니다. 고향인 아이오와에서 달려온 애인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병원 근처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테일러의 어머니와 함께 간병과 재활치료를 돌봤습니다.

 

  

 

그녀는 테일러 옆에서 항상 손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테일러가 버틸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다니엘의 응원이었습니다.

 

 

"힘내... 내가 항상 너의 두 다리가 되어줄게.."

 

 

"네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듯, 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아"

 

 

테일러는 정성 어린 간호를 받으며 주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회복속도를 보이면서 군의관들이 감탄할만큼 열정적으로 재활치료에 전념했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니엘과 같이 역경을 이기며 양팔, 양다리 없이도 살수있는 방법을 하나하나 익혀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무공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는데 수여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폭발사고를 겪고 이 자리에 있기까지 몹시도 고된 모든 과정을 거쳐갈 수 있게끔 
 다니엘르가 옆에서 저를 도우면서 제 곁을 지켜줬습니다. 
 제가 손이 있다면 이 훈장을 빼내서 다니엘에게 대신 달아주고 싶습니다"

 

 

“The greatest pleasure in life is doing what people say you cannot do.” - Walter Bagehot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모두가 해내지 못할거란 일을 비로써 이루어 냈을 때이다.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

 

실명 판정을 받은 후 현저히 시력이 떨어져 갑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 그러나 그 고통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이동욱 씨는 2004년 망막 생소 변성증이라는 병을 진단받은 후 점차 시력을 잃기 시작해 2010년 법적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희망의 아이콘이 된 개그맨 이동욱씨의 이야기에 대해 소개합니다.

 

 

2004년 봄, 이동욱씨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연애 시절부터 야맹증이 심해서 불편함을 겪었던 터라 이동욱 씨 아내 김은숙 씨는 어느 햇살 좋은 날,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야맹증에 좋은 약을 처방받고 나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며 신혼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동욱씨 부부는 집으로 금방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이동욱씨는 책상에 엎드려 겁에 질린 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절규했고, 아내는 그런 이동욱씨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막 색소변성증' 눈의 망막 세포가 변해 바깥 시야가 좁아지면서 터널처럼 가운데 부분만 보이다가 점차 시력을 잃는 병입니다. 미국은 40만 명의 환자가 있고 일본은 6000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발병 원인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아 딱히 치료 방법도 없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약조차 명확하게 나온 게 없는 희귀병입니다.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그런 진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엔 이동욱씨에게 운명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이동욱씨는 수년이 흐르는 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지고 개그 그룹 '틴틴 파이브'의 멤버로 홍록기, 표인봉, 김경식, 이웅호 등과 함께 박수소리에 파묻혀 지냈던 날도 세월 속에 점점 잊혀졌습니다.

 

 

툭하면 시비 걸고 소리 지르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취하면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술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음 병을 진단받고 5년 동안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 지냈다고 합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인상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돈을 못 벌어 오고 술만 마시며 잠만 자는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참담한 현실을 참아내기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동욱씨 아내는 오히려 이왕이면 좋은 곳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라고 했고 늘 손에 용돈까지 쥐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내의 정성스러운 그 사랑 앞에 이동욱씨는 서서히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이동욱씨는 아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아내게엔 청력 상실이나 반신마비 등과 같은 후유증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동욱씨 부부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더 이상 원망해봤자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이동욱씨 아내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누워있으면서도 이동욱씨에게 시력이 남아있을 때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으니 여행을 다녀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병원 밖으로 나와 통곡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날 흘린 눈물을 통해 비로소 내가 남편 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동욱씨 아내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이동욱씨는 1급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동욱씨 사연을 들은 천안에 사는 40대 남성이 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동욱씨는 눈을 기증받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돌아오셨나요?"라는 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이동욱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눈을 기증하겠다는 그 남자는 '근육병' 환자였습니다. 사지를 못쓰는 오직 성한 곳이라고는 눈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분은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마저 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동우씨는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의 권리가 있다. 병을 고백하고 숨어있지 말고, 세상과 소통했으면 좋겠다. 비장애인들도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야 주변에 있는 장애인들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라고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동씨는 "소원이 있다면 단 5분 만이라도 딸 지우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는 예쁘다는 걸 보아서 알지만 딸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쁘게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라고 말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동욱씨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철인 3종 경기에 출전을 하기도 하고, 재즈가수로 변신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현재 SM엔터테이먼트 소속으로 소속사의 든든한 지원으로 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시소' 개봉(10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영화 '시소'는 앞만 못 보는 남자 이동우와 앞만 보는 남자 이재신의 운명 같은 만남과 따뜻한 우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 '시소(See-Saw)'라는 제목은 이동욱씨가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이동씨의 삶을 보면서 저 역시 좀 더 열심히 살고 주변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이동우씨 앞으로 좀 더 활발한 활동과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

 

한국유리공업(주) 최태섭 회장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서울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작은 사업을 하던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피난길을 준비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이 빌린 돈을 은행에 갚아야 할 기일이 된 것을 알고 돈을 준비해 은행에 갔습니다. 전쟁통에 사람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뭐든 챙겨서 떠나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반대로 돈을 들고 은행을 찾아간 것입니다.

 

 

은행 직원의 말에 남자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사실, 갚을 돈을 은행 직원에게 준다고 해서 그 돈을 은행 직원이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된다고 생각하는 마당인데... 그래도 갚으시게요?”
전쟁 통에 융자장부가 어디 있는 지도 모릅니다. 장부의 일부는 부산으로 보냈고, 일부는 분실됐습니다. 돈을 빌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갚지 않아도
“빌린 돈을 갚겠다고요? 

그는 돈이 든 가방을 열며 은행 직원을 불렀습니다. 은행 직원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여기 빌린 돈을 갚으러 왔습니다.”

"난리통에 내가 죽으면 돈을 갚지 못할 테지, 어서 받으십시오"

하지만 남자는 여러 생각 끝에 돈을 갚기로 결심하고 은행 직원에게 영수증에 돈을 받았다는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은행 직원은 남자의 뜻에 따라 돈을 받고 자신의 인감도장이 찍힌 영수증을 건네 주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남자는 가족들을 데리고 제주도에서 군납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선한 생선을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되어 갈수록 물량이 많아지자, 그는 원양어업에 뛰어들면서 원양어선 을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수중에는 큰 배를 살 만큼의 돈이나 담보물이 없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배를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은행을 찾아가 융자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은행에서는 전쟁이 막 끝난 후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융자는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융자 받기를 포기하고 은행 문을 나서려다가 문득 자신이 전쟁 중 피난길에 서울에서 갚은 은행 빚이 잘 정리되었는지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려 예전에 받은 영수증을 은행 직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장의 영수증이 모든 상황을 바꿔 놓았습니다.
 


영수증을 본 은행 직원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 바로 당신이군요. 피난 중에 빚을 갚은 사람이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정직함은 은행가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답니다.”
직원은 그를 은행장의 방으로 인도했고 은행장은
“당신처럼 진실하고 정직한 사업가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필요한 금액을 흔쾌히 융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융자받은 사업 자금과 은행권의 신용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땅에서 나는 원료로 국가 재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두명의 동업자와 의기투합해 1957년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에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판유리를 한국 원료와 기술로 국내 최초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정직의 성품으로 한국의 존경 받는 경영자가 된 그가 바로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현 한글라스)의 설립자인 故 최태섭(崔泰涉·1910~1998) 회장입니다.  

 

 

故 최태섭은 직원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랐습니다 1969년 기업공개시 친인척의 지분이 10%가 넘지 않도록 했으며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습니다. 한국유리 노조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61년에 만들어졌지만, 회사 경영층과 큰 갈등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일용직의 점심식사비는 남겨두는 그를 보며 노조위원장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은 그것이 힘이든, 돈이든, 자식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즐겨했던 최 회장은 자신의 소신대로 기업 이윤의 20%는 사회에 환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남을 위해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이 얼마되지 않아도, 남을 돕는 데 자기가 가진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참된 부자다.” 1998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가 남긴 말 한 마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정직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각, 말, 행동을 거짓 없이 바르게 표현하여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1

 

지금 들려드릴 이야기는 외국의 어느 자전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경매장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전거를 사려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대부분인 경매장 맨 앞자리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손에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고 아침 일찍 나온 듯 초조한 얼굴로 앞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그 앞자리에 앉아있던 소년은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고 "5달러요!"하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곧 옆에서 20달러를 외쳤고 옆사람에게 첫 번째 자전거가 낙찰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년이 손에 쥐고있던 5달러로는 어림도 없었고 15달러나 20달러 어떤 자전거는 그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갔습니다.

 

보다 못한 경매사는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자전거를 사고 싶거든 20달러나 30달러쯤 값을 부르거라" 그 말을 들은 소년은

 

"하지만 아저씨, 제가 가진 돈이라곤 이게 전부에요"

 

그러자 경매사는 " 그 돈으론 절대 자전거를 살 수 없단다 가서 부모님께 돈을 더 달라고 하렴"

 

"안돼요. 아빤 실직 당했고 엄만 아파서 돈을 보태 주실 수가 없어요. 동생한테 꼭 자전거를 사가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라는 말과 함께 소년은 아쉬움에 고개를 떨궈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경매는 계속돼지만 소년은 자전거를 사지 못했고 여전히 제일 먼저 5달러를 외치고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그날 경매의 마지막 가장 좋은 자전거가 나왔습니다. 경매사는 "자, 최종 경매에 들어갑니다 이 제품을 사실 분은 값을 불러 주십시오"라고 외쳤고 마지막 경매가 시작되자 풀 죽은 얼굴로 앉아 있던 소년은 힘없이 작은 목소리로 5달러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순간 경매가 모두 끝난 듯 경매장 안이 조용해지더니 아무도 다른 값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경매장은 "5달러요. 더 없습니까? 다섯을 셀 동안 아무도 없으면 이 자전거는 어린 신사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경매사와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5..... 4.... 3.... 2... 1....

 

 

"와~~아!!!" 마침내 소년에게 자전거가 낙찰되고 소년이 손에 쥔 꼬깃꼬깃한 5달러짜리 지폐를 경매사 앞에 내놓자 순간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향해 일제히 박수를 쳤습니다.

 

 

이 자전거를 받게 된 동생은 형의 마음을 알았는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생이 바로 1999 ABC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운동선수, 2002 Sports 잡지 선정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 2002~2005 AP통신 선정 올해의 선수, 2003~2006 ESPN 시상식 최고의 스포츠 선수, 1999~2005 투르 드 프랑스 대회 사상 최초 7연패 달성을 한 미국 최고의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심장수수을 받아야만 했던 한군.. 그러나 이 아이는 수술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군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일을 못 했고 할아버지는 학원 셔틀 버스를 운전해 버는 85만원이 가족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였습니다. 한 번에 1000만원이 넘는 수술비와 입원비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없이 한군을 키운 할머니는 한군의 아빠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이를 그냥 천국으로 보내자" 며 말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아이의 생명이 쓰러져가려는 찰나 한 할아버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덕분에 한군은 5번의 수술비 전액을 후원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아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군은 2001년에 심장에 작은 구멍들이 뚫리고 판만이 제대로 닫히지 않게 태어났습니다. 최군의 어머니는 결혼 10여 년만에 첫 아이를 얻은 기쁨을 누림도 잠시 치료비 걱정에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사업이 부도난 상태라 집을 팔아 첫 수술비를 댔는데 몇 년 뒤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너무 막막해 어찌할바를 몰라 주조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심장재단의 소개를 받아 한 기업으로부터 수술비 전액인 800만원을 후원받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무려 4,242명의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새 생명을 찾아준 오뚜기의 창업주인 故함태호 명예회장입니다.

 

2016년 9월 14일 어느 새 훌쩍 자란 한군(11세)과 최군(15세)은 자신에게 새 생명을 준 할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이제 다시 만날 수가 없어 큰 소리로 목놓아 울었습니다.

 

 

상주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은 아이들을 안으며 "너희들이 와줘서 아버님이 정말 좋아하시겠다. 건강히 잘 자라야 한다"고 다독이자 최군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한 다음에 건강한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찾아뵈려했는데....."라며 엉엉 울었습니다.

 

1992년부터 24년 동안 심장병 어린이 후원을 이어왔던 함태호 명예회장... 그는 좀처럼 선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길 꺼렸지만 수혜자들의 편지에는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줬다고 합니다.

 

"더욱 건강해지고 잘하는 수영도, 공부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서 멋진 청년으로 자란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의 미래이자 일꾼인 어린이들이 수술비가 없어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후원이 계속되어 더 많은 아이가 운동회나 체육시간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지 않고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뚜기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해온 한국심장재단은 "직접 조문을 오지 못한 후원아동들이 재단 앞으로 하루에 수십 통씩 추모 편지를 보내고 있다" 고 했습니다.

 

 

함 명예회장은 작년 11월 열린 '4000번째 후원 아동 탄생 기념행사'에서 수혜 가족들에게 '5000번째 후원이 이뤄지는 걸 보고싶다' 라고 말했지만 생전에 소원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2001년 태어난 직후와 2011년 두 차례 수술을 받고 건강해진 박양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박양은 " 오뚜기 할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제2의 부모이고 할아버지의 큰 사랑에 보답하며 열심히 살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故 함태호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기업들은 대형마트의 시식사원으로 인력업체에서 단기 교육만 받은 직원들을 뽑지만 오뚜기는 시식 사원 1800여 명 전체를 정규직으로 고용했습니다. 함 명예회장은 비정규직으로는 뽑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규직으로 뽑은 결과 이들의 제품에 대한 애정도가 훨씬 높아져 회사 입장에서 오히려 큰 덕을 보고 있다고 오뚜기 홍보실장은 말했습니다.

 

 

대형마트 한 관계자는 "우리한테 수시로 찾아와 오뚜기 제품을 늘려달라, 제품을 잘 보이는 데 진열해 달라" 고 요구하는 건 정직원으로 고용된 오뚜기 직원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故 함태호 명예회장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회공헌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작금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매일마다 올라오는 각박하고 어두운 뉴스로 돌처럼 딱딱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함태호 할아버지는 한줄기의 사랑의 빛을 비춰 우리 마음에 별이 된 것 같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