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대한민국 해군의 해군력이 압도적입니다. 사실 대한민국 해군의 적수는 북한 해군에 비교하는 자체가 비교가 안될수도 있지만 주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비교되어야 합니다. 북한은 대부분이 연안함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정규전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잠수함도 구형의 2,000톤급이 대부분 퇴역하였으며 주력은 신형 300톤급의 상어급 잠수정으로 40여척을 보유하고 있는데 잠수함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체급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북한은 지형의 차이가 있는데 북한의 경우 동해와 서해가 대륙으로 인해 완전히 갈라져 있어 동서가 따로 해군력을 키워야 하는 실정이지만, 우리나라는 동해와 서해가 남해를 통해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해군력을 보다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에서 벌어진 천안함 사건 당시 포항급에는 제대로 된 대잠 장비나 대응체계가 존재하지 않아 북한 해군에게 무기력하게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 해군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포항급까지 SLQ-261K TACM을 설치하였으며 동시에 광개토급 이상은 SQR-220K와 SLQ-261K TACM을 연동시키고 울산급은 별도의 소형 예인형 어뢰탐지기인 SQR-260K를 설치하여서 주력함들이 무기력하게 어뢰에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해군은 지속적으로 대잠전훈련을 미 해군과 혹은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통합 대잠전훈련의 경우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대잠능력 강화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시작해, 7기동전단 및 1․2․3함대 소속 수상함정, 잠수함, 항공전력이 참가하는 작전사급 규모의 대잠전훈련으로 매년 2차례씩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수함 탐지 임무를 수행하는 전 작전부대 음탐사를 포함한 함대 및 작전사 전투기량 경연대회도 연 1회 실시해 전투역량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북한 해군이 수상함 전력으로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잠수함 전력을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북한 해군의 잠수함 전력은 전면전에서 별 의미가 없으며 단순히 짧은 시간 내에 단거리를 침투, 매복, 기습하는데 특화되어있는 소형 디젤 잠수함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에도 이러한 소형 잠수함(연어급)이 모함과 함께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들은 소규모 국지도발에나 의미가 있을뿐 일정 규모 이상의 충돌이나 전면전에서는 철저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러한 이유로 북한 해군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바다 한복판에서 함대결전을 벌이진 않을 것이고 동해에서는 잠수함 작전, 황해도라는 지리적 이점이 존재하는 서해에서는 해안포, 지대함 미사일, 항공기, 잠수함 등 가용할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텐데 우리 대한민국 해군은 구형이라고 비웃는 북한의 스틱스조차 제대로 막아낼 함정이 주력 구축함 12척 말고는 없습니다.

 

 

게다가 북한은 잠수함에 이어 수상함 면에서도 한국 해군과 같은 76mm 주포를 장착한 신형 전투함에 이어, 하푼과 동급인 대함유도탄 KH-35를 탑재한 신형 미사일 고속정 해삼급까지 배치하면서 대한민국 해군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북한 해군이 대한민국 해군의 주력인 제7기동전단이 도착하기 전에 해역함대 주력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도 어느정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해군은 구축함보다 호위함 이하 급이 훨씬 많기때문에 일본처럼 구축함급을 40여척이나 보유하진 못해도 20여척 정도는 보유를 해야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은 최근 해군의 방산비리 문제로 해군의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고 특히 통영함 소나 사건으로 이미지 손상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러나 현정부 들어서 작년부터 군비리 척결을위해 여러 방면으로 수사를 하면서 각종비리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방산비리를 현실적으로 완전히 없애진 못하더라도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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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대만을 점령하기 위해 창설된 중국의 해병대(해군 육전대)는 장비와 병력이 부실해 주로 근해에서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에 대만은 본토를 수복한다며 한때 2개 사단 규모의 해병대를 육성하다 냉전 후 9000명으로 감축한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중국의
해병대는 6천명 수준의 여단 2개로 구성되어 있다가 남중국해의 마찰이 심화된 이후, 현재는 약 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은 대대적인 군 조직 개편을 통해 육군을 대거 감축하는 대신 해병대 병력을 대폭 늘린다고 합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이미 중국군 해병대가 2개 특전여단을 흡수해 병력을 기존의 2배인 2만 명으로 늘린데 이어 2018년초까지 10만명을 보유한 6개여단 체제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중국 해병대는 중국 본토의 주요 지점에서만 운용되었는데 이는 적은 병력 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병력이 5배 이상 증강되기 때문에 다양한 해외 작전에 투사가 가능해지며, 이는 해외에 대한 무력 투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의사로도 받아들여 질 수 있어보입니다. 만약 중국 해군 해병대가 10만명이 될 경우 한국 해병대(2만8000명)는 전 세계 해병대 가우데 병력수 기준으로 순위가 미 해병대(18만명)에 이은 2위에서 3위로 떨어지게 됩니다.

 

 

또한 중국이 해병대 병력을 5배로 확대한다고 하자 일본과 대만은 이에 맞설 전력 강화를 검토중이라고 합니다. 특히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군사분쟁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해병대를 엄청난 숫자로 늘리는 것에 대응하기위해 앞으로 중국의 외곽 도서 침략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섬 상륙, 수륙 양용 작전의 전술 전투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은 방어용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에 반발해 한반도 유사시 바로 투입 가능한 해병대 사단을 올해 3월에 창설한 것으로 드러났었습니다. 중국의 북해함대 소속 해병대는 유사시 한반도 상륙작전 투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부대 전환과 적응 훈련을 거치면 이들 함대는 수륙 양용 공격 능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상륙작전 등을 위해 헬리콥터 여러 대가 동시에 이착륙할 수 있는 자국산 초대형 강습상륙함을 건조하는 등 해군력을 키우는 데 각별히 공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시진핑이 대만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고,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미국과 일본, 필리핀 등 주변국을 견제하면서 군사적 우위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또한 미군이 남중국해 인근에서 군사훈련을 벌여 중국도 맞대응할 필요성을 느낀듯 합니다. 이에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독도함(1만8800t급) 1척을 운용 중이며, 2번함은 현재 한진중공업에서 설계 중으로 2020년쯤 도입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체수송능력은 열악한 수준인지라, 미국의 도움 없이는 상륙작전 1회에 고작 천여명 정도를 투입할 수 밖에 없으며, 상륙시 한번에 투입가능한 전차 대수가 한손에 꼽을 정도 밖에 안된다는 점이 상당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숩나다. 독도함 기준으로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전차가 고작 2대뿐입니다.  

 

 

해병대의 상륙전력 구성 자체가 한미연합작전을 상정하고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 해병대는 우리 육군이나 공군과의 공조보다는 미 해병대나 미 해군과의 공조가 많은 편이며 오히려 이 쪽이 훨씬 빠르고 쉬운 편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산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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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직후인 1918년 말엽 이후부터 승전국들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패전 국가들의 국가 해체와 국방력 약화, 새로운 국제질서 성립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즉각적이면서 실질적인 전리품으로서 승전 열강들이 탐내고 있던 것은 바로 독일 대양함대였습니다. 해전의 핵심이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이던 이 시기에, 독일이 보유한 온갖 종류의 전함들은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습니다.

 

 

6개월여 기간이 지나 종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협상 내용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독일 대양함대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각각 나눠갖기로 합의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열성적이었는데, 전쟁 전에 만들어둔 주력함 70만톤 계획안이 전쟁으로 파탄난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의 자존심은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의 막강한 수상함대 전력을 보유한 독일 해군은 승전국인 영국의 지시로 주력함대를 영국 본토 북단의 천혜의 군항 스캐퍼플로(Scapa Flow)로 이동시켰습니다. 독일 대양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루트비히 폰 로이터(Ludwig von Reuter) 제독은 영국 함대의 눈을 피해가며 억류된 모든 함정들에게 자침 준비를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21일, 스캐퍼플로의 영국 함대가 훈련을 위해 대대적으로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정대로 영국 함대가 출항하자 로이터 제독은 오전 10시 30분, Z 상황(자침)을 알리는 11호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수신한 독일 각 함의 잔존승무원들은 일제히 해수밸브를 열고 자침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국 함대는 급하게 스캐퍼플로로 돌아와 자침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배들은 해수가 가득 차서 해저에 착저하여 자침이 끝났거나 이미 해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단 몇 시간만에,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해군 함대가 자침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소멸했습니다.

 


침몰한 전함만
카이저급 전함 5척, 쾨니히급 전함 4척, 바이에른급 전함 2척 총 11척이며 모두 하나같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독일의 최신예함이었습니다. 특히 바이에른급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버금가는 15인치 주포를 탑재한 신예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서 그 당시에도 매우 아까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서
순양전함 5척, 순양함 8척과 구축함 50척도 같이 자침하면서 총 60여 척의 군함이 침몰하였고 그렇게 독일 대양함대는 소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분노를 안겼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해군은 대양함대의 치욕을 갚고자 가장 먼저 스캐퍼플로를 공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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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을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주만을 상기하라"(Remember Pearl Harbor)는 절규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고, 복수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전국의 모병소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 속에 아이오와주 워털루 출신의 설리반 5형제도 있었습니다. 설리번 형제들에게 진주만 습격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이들의 유일한 누이, 제느비에브의 약혼자 윌리엄 볼이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 아이오와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미 해군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는 맏형 조지(28), 차남 프랭크(26)와 삼남 조셉(23), 사남 매디슨(22), 그리고 막내인 알버트(20)까지 모두 해군에 자원 입대를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 해군 규정에는 가족은 같은 함정에 배치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맏형 조지는 해군 장관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함께였었고 함께 승리 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워싱턴의 해군성에서는 설리번 형제의 동반 입대가 멋진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 이를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2년 11월 13일 새벽, 과달카날 해전에서 설리번 5형제가 타고 있던 주노 함은 교전 도중 일본 해군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 중 1발에 뱃머리를 피격당했고, 수리를 위해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철수하던 도중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 탄약고가 대폭발, 침몰하였습니다. 철수하는 함대를 이끌던 후버 대령은 일본 잠수함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의 구조활동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주노의 구조를 포기하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그대로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가버렸습니다.

 

 

당시 주노에서는 100여명의 승조원이 탈출했지만, 구조가 늦어진 결과, 대다수가 기아, 탈수, 상어의 공격으로 인해 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자들 중에 설리번 5형제가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3명은 폭발에 의해 즉사, 막내인 앨은 다음날 익사했고, 맏형 조지는 며칠 후 구명보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설리번 5형제 아버지와 어머니)

결국 약 8일 후 형제를 제외하고 구조된 생존자는 약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주노의 격침과 대규모 인명피해를 보고 받은 헐지 제독은 그 책임을 물어 후버 대령을 직위해제시켰습니다. 설리번 부모는 전사통보를 받지 못하고 단지 미 해군이 교전으로 인해 많은 함정이 침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들어 해군측에 물어보았지만 M.I.A.(Missing In Action, 교전 중 실종)통보만을 받고, 나중에야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쓴 전사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후에 설리번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미 군함의 이름으로 '설리번 형제'(The Sullivans)가 붙게 되었습니다. 초대 USS 설리번 형제는 플레처급 구축함 DD-537로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65년에 퇴역하여 보존함 처리되었습니다. 2대 USS 설리번 형제는 알레이버크급
DDG-68로 1997년에 취역하여 아직 현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은 한 형제의 같은 부대나 함정의 근무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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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일본군은 러시아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군홋카이도를 거쳐 혼슈 북부로 침공함을 막는 방어작전이었습니다. 일본 육군 8사단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물자 보급선을 확보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8사단은 아오모리에 주둔한 5연대 2대대에 동계 산악행군을 겸한 보급로 탐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하되 1대대와 3대대에서 병력을 약간 차출하여 최종적으로 210명의 병력이 차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에 임하면서 전 병력에게 혹한을 대비하도록 했는데 발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양말을 3겹으로 신게 했습니다. 그리고 210명의 병력이 1902년 1월 23일 목요일 아침 7시경 부대를 출발했습니다. 행군 초반에는 여정이 매우 순조로웠고 날씨도 혹한기 산악훈련을 하기 적절한 추위 정도였기에 순조롭게 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오후부터 급격하게 기상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산 중턱 가까이까지 올라갔는데 급격하게 추워지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지휘관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고민끝에 일단 계속 가보자는 최악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눈은 계속 더 쏟아지고 밤이 될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으며,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던 비상식량도 다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나 지휘부는 야간행군을 강행했습니다. 폭설과 혹한 속에서 제대로 된 보온조치 없이 휴식하고 수면을 취하다간 숙영지를 공동묘지로 만들 뿐이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지휘부는 고민 끝에 복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눈이 하도 와서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길을 찾지 못한 부대는 부대원 다수가 동사할 것임을 알면서도 개활지 한 곳을 잡아 임시 숙영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땅은 얼어붙었고 공구를 지닌 병사들은 다수가 낙오하여 그나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의 체감 온도는 무려 영하 50도에 달했고 결국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5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지휘관은 이날 아침 그나마 체력이 남았다고 판단된 병력을 특무조장 2명을 포함한 12명을 선발하여 2개 조로 척후대를 편성, 각 특무조장을 척후대장으로 임명한 후 선발로 내보냈습니다. 이들 척후대 중 1개 조는 이후 연락두절, 전원 동사했으며 다른 1개 조는 길은 찾아내었으나 민간인이나 마을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은 생존자들도
거의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대원 210명 중 60~70명밖에 남지않은 상황이였습니다. 그리고 1월 26일 한명이 구조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어 구조되었지만 이미 훈련에 참가했던 210명 중 199명이 추운 혹한의 날씨에 사망한 후 였습니다. 이 사건은 평시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서는, 생존률이 고작 5%에 불과한 이례적인 대규모 참사였습니다.

 

 

그 후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치 산을 행군하는 듯한 군인들의 모습이 목격되고 군인들의 군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미스터리한 사망사건들이 발생하는 등 핫코다산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사고가 계속됐습니다.

 

 

사람들은 핫코다산에서의 죽음을 동사한 군인들의 원혼으로 여겼고, 핫코다산을 '저주받은 산'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해가 지면 핫코다산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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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아군의 막대한 피해와 한국군의 전술력 부족을 체감하여, 사후대책을 마련한 것이 바로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입니다. 강릉지역 무장 공비 때문에 인제에 배치된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원래 창설은 대전의 육군 본부 근처에 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훈련장 조건이 원활하지 않아, 훈련장을 여러곳 알아보다가 찾게 된 곳이 인제 신남이였습니다. 인제 신남의 과학화훈련장은 여의도의 41배 정도 크기를 자랑합니다. 이런 여단급 과학 훈련장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미국, 이스라엘 정도밖에 없습니다.

 

 

과학화전투는 레이저, 영상, 데이터통신, 컴퓨터 등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해 실전같은 전투훈련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레이저로 부위격 타격판정이 가능한 마일즈 장비 등 각종 첨단 장비를 이용해 훈련을 하며, 이에 대한 상황과 그 위치 등이 30초 단위로 중앙통제 장비로 전송됩니다. 예를 들어 훈련 참가자가 심한 타격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을 경우 그는 실제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몸이 마비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소총을 상대방에게 쏘거나 해도 인식을 못 시키게 됩니다. 포 사격, 화생방 상황 등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측정되어 피해정도를 하달합니다.

 

 

 

 

 

과학화전투훈련장에는 북한군을 완벽하게 모사한 전문 대항군 부대인 전갈부대가 운용중이며, 북한 육군식 전술과 전략, 편제를 갖추고 활동합니다. 대항군 전갈부대 장병들은 정면으로 10 vs 50이 붙으면 3명 정도 죽고 50명을 싹슬이 할 수 있는 전투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 전투에 30명 정도는 잡아야 전투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복장도 최대한 북한 육군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고동색 민무늬 전투복과 가운데에 붉은 별이 그려진 민무늬 헬멧 위장커버를 착용하고, 계급장도 국군 계급장을 떼고 자기 계급에 상응하는 북한 육군 계급장을 착용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보직명도 소총수의 경우 그대로 소총수라고 부르지 않고 보총수라고 부릅니다. 역할 몰입이 강한 편이라 입소하는 훈련 부대를 한국군이라고 부릅니다.


전갈부대 대항군은 훈련장 지리를 완전히 꿰고있는데다, 훈련부대가 진지를 구축할 만한 곳이나 진격해올 만한 곳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적이 숨을만한 곳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대항군이 마음먹고 훈련부대가 진지 세울만한 곳에 포탄을 퍼부어버리면 바로 끝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갈부대는 "적보다 강한 적"인 전문대항군을 양성하기 위해 고강도 훈련을 실시합니. 자대 지형이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거라 매일 산악구보는 필수이고 체력만큼 전투 스킬도 중요하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나는대로 마일즈 훈련을 합니다.  리고 전갈부대는
 따로 유격훈련혹한기 훈련을 하지 않는데 이유가 매일 하는것이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도에 육군 모 사단에게 대항군이 깨졌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나 국방일보로만 나온 이야기라 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해당 사단에서는 대대적으로 관련 영상물을 만들어 홍보하고 있습니다. 2010년도에도 해병대가 전갈대대를 꺾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기도 했으나, 그 기사도 오보였습니다. 여담으로 이때 해병대는 땅을 파고 들어가서 위장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자기 부대가 전갈대대를 이겼다는 주장들이 가끔 나돌긴 하지만, 적어도 한국군을 상대로 한 훈련에선 전갈대대가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훈련부대들이 지맘대로식 과장홍보를 일삼고 그런 거짓성 홍보에 기반한 오보들까지 잇따르자 전갈대대측에서도 화가났는지 2012년도 훈련에선 봐주지 않고
초반부터 제대로 공격해서 대항군 보병 1개 중대가 해병대 훈련부대를 아예 초반에 다 쓸어버리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일본육상자위대 소속 이등육위삼등육위 등 12명이 대항군 '전갈대대' 12명과 맞붙어, 30여분간 진행된 전투에서 자위대원 11명의 몸에 레이저빔이 맞았고 1명만 겨우 생존하여 처참하게 당했다고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2012년
주한미군 육군 1개 대대가 전갈대대와 상호공방훈련을 벌여 전갈대대가 아주 완벽하게 패배하였다고 합니다. 미군이 정찰용 소형 UAV잔뜩 띄워놓고 대항군이 숨어있을만한 곳마다 화력지원을 요청하거나 저격수를 불러서 처리하고, 전갈대대의 장기였던 야간전도 미군이 거의 1인당 1개씩 보유하다시피 한 야간투시경 덕분에 상대가 안됐다고 합니다.

 

 

형UAV가 아니라 보병용 열상장비를 활용하여 먼저 찾아내서 먼저 공격하기 때문에 매복이나 위장을 해도 통하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여태껏 전갈대대가 무패였던 이유로 전갈대대가 마일즈장비에 숙달되었다는것과 지형을 잘알고 있다는 이유로 전갈대대가 이기는게 당연한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주한미군과의 훈련을 통해서 엄청난 장비의 차이는 극복이 안된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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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갈부대 이름만 들어도...후덜덜이네요..;;
    역시.. 기술과 장비...
    자본주의가 군사력도 좌우하겠죠..ㅠ
    포스팅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