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대한민국 vs 미국이 전쟁을 한다는 가정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나름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우리나라의 최첨단 군사력과 막강한 물량을 자랑했던 1945년 미국의 군사력이 맞붙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결과가 나올꺼라 생각하시나요. 결과를 따진다면 정말 생각해야할 변수가 정말 많습니다. 그렇다면 2017년 대한민국 vs 1945년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면 결과는?


 

1. 경제력

 

미국이 GDP의 40%를 국방비로 사용하는 1943년 이후에는 말그대로 show me the money가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 시기입니다.

2013년 한국과 1939년 미국을 비교하면 경제적인 규모 자체는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선박건조량, 철강생산량 등에서는 월등히 앞선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력과 물량만으로도 미국에게 우리나라가 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을 수도 있지만 단순히 경제력과 물량에 의해 한국이 질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나라가 진다는 주장은 총력전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GDP의 몇 퍼센트를 국방비에 쓰면서 국가를 정상적으로 꾸려 나갈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자칫하면 전쟁에서는 이기고 나라는 망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2. 전쟁 자본 능력

 

전쟁에 있어 경제성을 논한다는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전쟁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활동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1945년에 B-29 폭격기 1대에 불과 89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지금 돈으로는 12-15배 정도이니 150억원 정도에 제조에 가능합니다.게다가 전투기들은 그 1/10 정도이니 대략 10억 정도면 당시 미군의 전투기 한대가 생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같은 가격에 같은 성능의 무기들로만 싸운다면 한국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2017년 대한민국과 1945년 미국과의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찍어낸 항공기의 어마어마 물량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비슷한 물량을 뽑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F-15K 한대면 공대공 무장을 가득 채우고 출격시 프롭기 수십대 이상은 상대 가능할 수 있습니다. 


 

3. 무기 교환비

 

70년 간의 기술적 차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납니다. 100억 짜리 전차가 10억 짜리 전차를 10대 상대할 수 있다면 할만한 싸움 같지만 아군이 승무원 4명을 잃는 동안 적국은 40명을 잃게 되고 아군이 1대 분량의 유류, 탑재 무기를 손실하는 반면 적국은 10대 분량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1945년 전차 생산량은 86,333대, 장갑차 16,438대지만 그나마 중(重) 전차라 할만한 가장 강력한 녀석이 M-26 퍼싱인데 미군이 보유한 전차로는 우리나라 K-1, K1A1, K2를 어디를 쏘든 격파할 수 없고 반대로 우리나라 전차는 단 한발로 미국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경전차는 굳이 육군의 전차가 상대할 필요가 없고 K-21로도 벌집을 만들수 있으니 교전비를 따지면 1:100 정도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기갑 물량은 단지 대한민국 육군에 킬마크를 늘려주는 유인 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7년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는 F-15K 60대, F-16 168대, F-4E/RF-4C 82 대, F-5  186 대, KT-1 106 대, TA-50 47대, FA-50 20대,  E-737 4대, C-130H 12 대, CN 235 18대, F-35K(40대는 도입예정) 1945년 미국은 폭격기 96,765 대, 전투기 98,686 대, 정찰기 3,888 대, 수송기 23,661 대, 훈련기 57,561 대, 기타 15,868 대로 총 199,339대입니다.

 

 

이론적으로 F로 시작하는 공군의 전투기들은 공대공 미사일 장착 개수 만큼 미군 항공기를 격추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미사일이 떨어진 상황에서 에너지 파이팅을 통한 WVR로 킬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군기 수백대와 뒤엉켜 싸우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공중 충돌이나 눈먼 총알에 격추 당할 수도 있으니 방심은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이 압도적이긴 하나 한가지 문제는 공군의 미사일 자체의 보유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전은 비슷한 규모의 공군력과의 공중전을 고려해서 이루어지는데 수천, 수만대의 날것 들이 날아오는 건 어느 나라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비록 미군의 프로펠러기들이 평소 훈련에 사용하는 무인 표적기보다 잘 맞기는 하겠지만 명중율 90% 정도로 잡아도 3000대 정도를 미사일로 사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미사일의 추가 개발 및 생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효율적인 전쟁을 위해선 미국 항모에서 이륙한 함재기 수십대를 상대하려고 하기 보다 함재기를 적재한 상태의 항모를 격침 시키는 것을 노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해군의 경우는 세종대왕급 3척, 이순신급 6척, 광개토대왕급 3척 , 울산급 9척, 인천급 20척, 포항급 21척, 윤영하급 15척, PKX-B 20척, 209급 9척, 214급 4척 (9척 예정), 독도급 1척, LPD 4척 (예정), LST 4척, LCU 10척, LSF 5척으로 물량 만으로는 정말 답이 안나오는게 우리나라 해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구축함 전력은 항모를 상대하는 용도로는 쓸만하지만 전함을 상대하는건 가급적 하지 않는게 낫습니다.

 

 

해군에서 개전 이후 특정 무기를 대량으로 개량, 생산할 수 있다면 가장 효과적인 건 바로 잠수함입니다. 불과 20억원의 SUT 어뢰 또는 10억원 가량의 백상어 1-2발로 1945년 미국의 항모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전함은 중어뢰 1-2발로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림팩 훈련에서 214급 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209급이 미항모전단의 수상함을 수차례 모의 격침 시킨 것을 고려하면 1939년 당시의 요크타운 같은 항모라면 누가 어디서 뭘 쐈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침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건 미군의 잠수함 전력입니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예상외의 피해(예를 들면 수중 충돌)를 입을 수도 있으니 방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실제적으로 엄청난 교환비를 보일 수 있고 결국은 물량의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일부에서는 압도할 수 있으며 소요되는 비용이나 자원까지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됩니다.


 

 

4. 핵무기

 

흔히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핵때문에 북한을 쉽게 이기지 못할거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2차대전 수준의 10kt 정도의 전술핵 몇 발이 있는것이 고작이지만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효과는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일단 핵은 비대칭 전력에 해당되며 기존 재래식 전력의 우위를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같은 좁은 전장에서는 미리 길목에 설치해두고 아군의 기갑 웨이브나 공중의 스트라이크 패키지가 몰려 올때 폭발시키거나 탄도미사일에 탑재해서 한국의 공업지대나 오산기지, 성남공항 등의 군시설을 타격해서 폭발력, EMP, 방사능 등으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2차세계대전 종전까지 4발의 원자폭탄을 제조해서 1발을 실험에, 2발을 일본에 투하했는데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리틀보이는 4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은 4.6톤이나 되었기 때문에 B-29를 통해 투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9300 미터 고도에서 투하하였고 일본에는 핵폭탄을 투하했던 미국 폭격기를 요격할만한 전투기가 라이덴, 시덴 카이, 하야테 정도였으나 종전 무렵엔 요격할만한 전투기 자체가 거의 남아나지 않아있던 상황이였습니다. 만약에 B-29가 대놓고 고고도 주간폭격을 하러 오건 밤에 중고도 폭격을 하러오건 우리나라와의 전쟁에서 폭격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E-737, 이지스함에 의해서 이미 오키나와을 넘어온 순간 탐지가 되고 전투기나 지대공, 함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될 것입니다. 다만 잠수함에 넣어서 핵어뢰 처럼 해군의 함대 근처에서 자폭하는 방법을 시도해 보는게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공 가능성과 군사적 효용성은 둘째치고 너무나도 값비싼 녀석이라는 점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소요된 비용은 종전까지 18억 달러, 2014년 기준 240억 달러로 엄청난 금액으로 셔먼 전차 약 43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미국이 이런 고비용 무기에 비용을 쏟아 붓는게 이득일 수 있습니다. 셔먼전차 1,000대를 파괴시키는 것보다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 한대를 격추하는게 훨씬 쉽고 저렴한 비용으로 제압이 가능합니다.

 


역으로 우리가 핵을 만들어서 미국을 공격하는 시나리오 역시 가능합니다. 레이저로 우랴늄 농축을 하고 순항미사일에 탑재 가능한 크기의 소형핵탄두를 만드는건 6개월 정도면 가능할 것입니다. 굳이 군사적으로 사용할 필요 없이 작은 섬에 한발 날려주고 항복 문서에 싸인하라고 하면 나름 합리적인 미국은 항복을 할지도 모릅니다.


 

5. 무기개발과 생산

 

평시에도 F-15K 등의 외제 무기들의 비행유지율이 낮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전시가 되면 더욱 많은 고장, 손실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 현재의 무기 보유량 뿐만 아니라 무기를 개발하고 보수하기 위한 기술력의 수준이 중요합니다. 미국은 당시 기준으로 거의 모든 무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무기 개발 능력은 그 정도 수준이 안된다는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만약 예를 들어 F-15K 고장나서 못 띄운다고 KA-1만 주구장창 만들어서 날릴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일부 무기는 자력으로 생산 가능하겠지만 높은 교환비를 보이는 고가의 무기체계일수록 부품, 완제품의 수입이 꼭 필요합니다. 또한 전투기를 새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비용과 기술, 시간 모두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6. 본토 공략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추축국의 차이 중 하나는 미국은 본토를 공격 받지 않았고 독일, 일본은 맘껏 얻어 맞았다는 것입니다. 본토를 공격 받는 것은 상직적인 의미 이외에도 민간인 피해 뿐만 아니라 군수 공장, 산업 시설, 발전소 등에 타격을 줌으로서 적의 전쟁수행 의지와 능력을 급감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사실상 한국 본토를 때릴 능력이 없으며 1945년 8월 이라면 수천대의 항공기와 잠수함 등을 소모해서 인적 드문 교외나 바닷가에 폭탄 몇발을 떨어뜨릴 정도일뿐 우리의 주요 시설을 노리고 심각한 피해를 줄 수준이 안됩니다.

 


우리나라도 직접 미 본토를 때릴 방법이 제한적인건 마찬가지이나 그나마 미국 보다는 나은 상황입니다. 결국은 여러가지 이유로 태평양에 있는 주요 섬들을 점령 해서 전투기 운용이 가능한 활주로와 잠수함 기지를 확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강한 육군력을 이용해서 본토 상륙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수 있는데 미국이 바다를 군함들이 가득 메꾸던 45년 8월이 아니라면 레이더를 통해 적의 수상세력을 피해서 대규모 수송선단을 본토 서너 곳에 상륙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굳이 독도함, LST를 다 동원할 것 없이 대형 컨테이너선을 개조해서 1-2개 기보사 정도의 병력과 몇주 작전할 정도의 물량을 같이 상륙시키고 그곳을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선처럼 교두보로 사용하며 소모전을 강요하거나 점차 점령 지역을 넒혀 간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7. 특수전

 

2차 대전 당시에도 특수전의 개념이 시작되는 등 제한적인 특수전이 수행되었습니다. 다만 전술이나 장비 등에서 기존의 보병과 크게 차이나는 수준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미국의 특수부대가 우리 본토, 점령지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장점은 부족한 개개인의 화력을 전투기나 잠수함 등의 LGB, 순항미사일 등을 통해 보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국의 국토가 넓어서 도보 이동을 통한 특수부대의 작전이 다소 기간이 걸릴 수 있고 소규모 공장들이 여기 저기 분산되서 운용되는 관계로 군수공장 한두개 폭발 시킨다고 전력 저하가 현대전에서 보다는 적을 것입니다. 

 

8. 인력 수급

 

1945년 미국은 그 막대한 물량 뿐만 아니라 그 물량을 운용할 인력 수급에도 추축국에 비해 압도적인 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항공기 조종사의 양성을 예로 들면 최대 1년에 10만명 이상의 조종사를 배출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으니 1년에 공군, 민간 포함해서 조종사 수백명 배출이 고작인 우리나라와는 비교 자체가 안됩니다.

 

 
반면 한국군은 굳이 이런 전투기를 상대하는데 같은 전투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조종사 훈련을 MANPADs나 SAM 등을 사용할 수 있다. MANPADs를 예로 들면 방공학교에서 신궁의 경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론 22시간, 실습 55시간에 교육을 완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과 대응 체계의 발전을 통해 보다 저렴하고 짧은 기간에 대응 인력을 양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1945년 미국과 2017년 대한민국의 인구차는 고작 2.6 : 1에 불과합니다.


 

9. 결과

 

결론적으로 여러 변수들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승패를 결론내기는 불가능하지만 대략 1945년 미국과 역시 현재의 대한민국이 맞붙는다면 한국이 확실히 이길 것 같습니다. 다만 조기에 협상을 통해 종전을 맞거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망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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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천사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소개할까합니다.  테일러 모리스(Taylor Morris)와 다니엘 켈리(Danielle Kelly)는 10대 학창시절부터 연애를 했습니다. 그렇게 이쁜사랑을 나누고 있을때쯤 잠시 떨어져야하는 일이 생깁니다.

 

 

2012년 23이 된 테일러 모리스는 미군 해군 EOD tech에 자원입대하였습니다. 그 후 아프간 칸다하르로 투입된 그는 미군 특수부대에 배속되어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부대의 최선봉에 서서 통로를 개척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폭발물 처리반으로 파병 중 이었던 테일러 모리스는 금속 탐지기를 들고 전투정찰을 나섰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는 폭발에 휘말리는 순간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발을 딛자마자 알았습니다. 엄청난 폭음을 듣고, 열기를 느꼈어요. 외견상 보이지도 않았고, 탐지기에 소음표식이 잡히지도 않았어요. 내가 밟은 것이 구형 지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동맥이 모두 끊어져서 팔.다리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제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는 전우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테일러는 그 사고로 양팔과 양쪽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지난 10년에 걸친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에 약 2만 4천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이중 1,400명이 전투중 입은 전상으로 인해 팔.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는데요. 이중 4지 절단이라는 중상을 입고도 끝까지 살아남은 이는 여지껏 단 4명에 불과했답니다. 테일러 병장이 5번째라고 합니다.
 

 

 

 

참변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몸을 떨며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낼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고향의 애인 다니엘 켈리였습니다. 고향인 아이오와에서 달려온 애인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병원 근처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테일러의 어머니와 함께 간병과 재활치료를 돌봤습니다.

 

  

 

그녀는 테일러 옆에서 항상 손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테일러가 버틸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다니엘의 응원이었습니다.

 

 

"힘내... 내가 항상 너의 두 다리가 되어줄게.."

 

 

"네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듯, 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아"

 

 

테일러는 정성 어린 간호를 받으며 주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회복속도를 보이면서 군의관들이 감탄할만큼 열정적으로 재활치료에 전념했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니엘과 같이 역경을 이기며 양팔, 양다리 없이도 살수있는 방법을 하나하나 익혀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무공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는데 수여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폭발사고를 겪고 이 자리에 있기까지 몹시도 고된 모든 과정을 거쳐갈 수 있게끔 
 다니엘르가 옆에서 저를 도우면서 제 곁을 지켜줬습니다. 
 제가 손이 있다면 이 훈장을 빼내서 다니엘에게 대신 달아주고 싶습니다"

 

 

“The greatest pleasure in life is doing what people say you cannot do.” - Walter Bagehot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모두가 해내지 못할거란 일을 비로써 이루어 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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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최근 네이멍구(內蒙古)에 한국과 일본을 겨냥해 스텔스 장비도 탐지 가능한 최첨단 레이더를 설치했습니다. 문제는 중국이 설치한 최첨단 레이더한국과 일본의 수도 방향을 겨냥한 것으로 최대 탐지거리가 3천㎞가 넘는 초지평선(OTH·Over The Horizon) 탐지 레이더입니다. 사실 러시아는 예전부터 초지평선 레이더로 동해까지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해상 X밴드 레이더)

중국이 이번 설치한 레이더는 리 한반도에 설치되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의 X밴드 레이더의 탐지거리보다 훨씬 길어 우리나라는 물 일본까지 감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설치되는 사드 레이더가 중국의 하늘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는 주장 또한 과장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한반도에 사드 배치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대하던 중국이 사드 보복으로 다른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레이더는 전자파가 고도 100∼450㎞의 전리층에서 굴절, 회절되는 현상을 이용해 반사돼 오는 신호로 지평선 너머의 목표물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원리로 가동됩니다.

 

 

중국이 설치한 이 레이더의 첫째 임무는 상대의 미사일 발사 탐지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치측정입니다. 미사일 발사시 추진체의 열과 빛을 탐지해 발사 1분후에는 최종 타격목표를 확정할 수 있고 3분후에는 조기경보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한 태평양을 오가는 미국의 항공모함과 군함들의 행적을 24시간 추적할 수 있어 자국군 대함 미사일 부대에게 정확한 좌표와 실시간 상황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이 일본 해병 항공기지에 배치한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F-35B도 중국 레이더의 실시간 탐지 범위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중국은 톈보 레이더 외에도 곳곳에 수많은 위성과 레이더 기지를 운영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군사동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촘촘히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오산 미군기지에 F-22가 도착했을 때도 F-22 렙터의 훈련 과정 전체를 감시한 적도 있습니다.

 

(미국의 Pave Paw)

중국은 이미 헤이룽장(黑龍江)성 솽야산(雙鴨山)에 미국의 조기경보시스템 페이브 포(Pave Paw)와 성능이 맞먹는 탐지거리 5천500㎞의 신형 위상배열 레이더를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또한 산둥(山東)성에도 러시아산 지대공 미사일 체계를 도입하면서 탐지거리 700㎞의 S-400의 레이더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들어오는 사드는 중국의 강력한 반대 덕분에 사드 레이더의 장거리 모드 배치는 사실상 막은 상태입니다. 중국은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정작 북핵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한반도 사드 문제에는 이렇게 민감하고 반응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지 그 속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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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공방전은 러일전쟁에서 가장 길고 많은 희생자를 양산했으며 공병대에 의해 요새화된 진지와 기관총, 철조망의 조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러일전쟁 개전 당시 일본측은 일본 본토에서 만주에 이르는 보급로 및 진격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는데 보급선을 안전화시키기 위해서는 황해의 제해권을 쥐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뤼순에 영구적인 해군 기지를 건설하여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와 러시아 육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은 비록 청일전쟁에서 뤼순항을 공략한 경험이 있으나, 이후 러시아군이 새로이 건설한 방어진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습니다. 때문에 뤼순으로 전진해 나가는 일본군은 한달여동안 최대한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를 파악하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시간 소요는 러시아군에게는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뤼순 요새의 방어라인은 총 29km에 달하는 달했으며, 이 중 9km는 해안선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총 646문의 대포와 62정의 기관총이 있었습니다. 이 중 123문의 대포와 5정의 기관총은 해안선의 고정포대들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육상 방어로 돌려졌습니다. 화력의 규모 자체는 충분했으나 대다수가 구식이여서 사거리 부족 문제가 심각했는데, 러시아군은 이를 효율적인 포대 배치 및 운용체계를 짜서 보병과 포병이 효율적이고 긴밀하게 합동 작전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통해 커버하였습니다.

 



포 1문당 평균 425발의 포탄이 준비되어 있었고, 밀가루 168일분, 수수와 옥수수가 127일분, 설탕 169일분, 건빵 27일분, 소금 200일분, 육류 20일분, 귀리와 보리, 대두가 155일분, 건조야채가 173일분의 식량이 요새 안에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요새의 저장능력이 부족하여 식품이 금방 부패되었고, 또한 우물의 갯수도 부족하다보니 전진진지와 각 요새에 충분한 식수를 공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본군 뤼순 요새 1차 총공세(1904.8.19~24)


일본군의 포격과 전 전선에 걸친 양동공격은 19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서북면의 주요 러시아군 전진 진지들은 일부는 함락되었고 일부는 버텨냈습니다. 또한 동부전선에는 집중적인 포격을 가해 주요 방어시설을 파괴하여 추후 주력부대의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 일본군 주력군의 공세는 21일 새벽에 실시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동부의 방어라인을 돌파하여 한번에 전투를 끝낼 생각을 했고, 실제로 22일까지는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러시아측 역시 예비대를 집중시켜 이를 막아냈으며, 23일에 일본군 4개 여단을 투입한 공격이 격퇴당하자 24일 공격을 취소하고 확보한 진지들의 방어선을 굳히는 쪽으로 선회하였습니다

 


1차 총공세에서 일본군은 전사 5,017명, 부상 10,843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사실상 한개 사단이 괴멸당한 거나 다름없는 큰 피해였습니다. 본질적으로 잘 무장된 요새를 단기간의 총공세로 함락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계획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 였습니다. 러시아군은 사상자, 부상자 도합 6천에서 7천 정도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일본군 뤼순 요새 2차 총공세(1904.9.19~24)

 

1차 총공세 후 일본군은 뤼순이 단기간의 돌격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력한 콘크리트 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280mm 포를 비롯해 다수의 포병세력 또한 지원받아 화력을 증강시켰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은 8월 31일에 재차 공세를 결정합니다.


 

19일 밤 시작된 2차 공세의 결과 20일 새벽, 해서산의 러시아군은 철수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이 교전에서 전사 924 명, 부상 3,925 명의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 군은 전사 600 명, 부상 2,200 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 뤼순 요새 3차 총공세(1904.10.26~30)

 

10월 15일에 러시아의 발틱함대, 즉 제2태평양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제2태평양함대가 황해에 도착했을때 뤼순과 뤼순에 정박해 있는 제1태평양함대가 러시아의 손에 남아있다면, 그순간 황해의 제해권은 러시아에게 넘어가고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10월 26일, 280mm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동부전선의 주요 보루들과 뤼순 시, 항구에 대한 포격으로 일본군은 3차 총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4일간 이루어진 이 포격은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들 상당수를 파괴하였으며, 또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26개 중대의 러시아군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습니다.

 

(3차 총공세에 흰띄를 두른 일본 결사대)
9사단, 11사단 전체와 1사단 일부 부대가 참여한 일본군의 총돌격은 30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총 5개 종대에 달하는 돌격이었으며, 2개 종대가 별도의 예비대로 대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낮 12시에 실시된 이 대규모 돌격은 딱 3시간만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4일간의 포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러시아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으로 일본군을 방어하였고, 공격로 쪽으로 화력이 집중된 결과 단 하나의 종대도 러시아 수비대를 밀어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지휘부는 장기간 준비한 총공세가 3시간만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빠르게 실패를 인정하고 군을 물렸기 때문에 일본군의 사상자 역시 러시아군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억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군 뤼순 요새 4차 총공세(1904.11.26~12.6)

 

일본군은 11월 초에 제2태평양함대가 인도양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육군을 지휘하는 오야마 이와오 육군 원수와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중장에게 큰 위기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최대한 빨리 뤼순항을 함락하여 제1태평양함대 주력을 제거하고, 이후 연합함대의 함선을 수리하여 제2태평양함대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습니다. 그렇게 총원만 따지면 1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부대가 되었습니다.


당초의 공격 목표는 요새 전면이었습니다. 26일 하루종일 이어진 맹공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피해만 늘어났기에 결국 4차 총공세 역시 초기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단 하룻동안에만 4,500여 명의 사상자라는 큰 피해를 내고 말았습니다. 러시아군 역시 전사자만 1,500명에 육박하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의 피해에 비하면 적은 것이였습니다.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일본군 간부)
11월 27일부터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203고지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12월 2일부터 4일까지 포격을 집중한 후 일본군은 재차 공격에 나섰으며 12월 5일 공격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4차례에 걸처 양쪽은 203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일을 반복하였는데 최종적인 승자는 일본군이였습니다. 203고지가 함락된 후 다른 전방 거점들에 주둔하던 러시아군 역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측의 피해

일본군은 최소 8만에서 최대 15만까지 뤼순 공략을 위해 투입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는 57,78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 중 14,000여 명은 전사자였습니다. 또한 33,769명의 질병환자를 배출했는데 그 중 21,023명은 각기병 환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치로, 기록에 따라서는 9만에서 11만의 사상자를 배출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방위전력 5만여 중 1만 6천 정도가 전사하였으며, 일부는 함선들이 탈출할 때 탑승하여 탈출하였습니다. 항복시 남아있는 수비병력은 32,400여 명인데 이 중 5,809명은 부상자 또는 환자였습니다.


그 이후 러일전쟁

 

일본군 뤼순의 함락은 러시아 제2태평양함대의 운명도 어둡게 하였습니다. 뤼순항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제2태평양함대는 뤼순을 거점으로 재정비, 황해의 제해권을 노려볼 수 있었으나 뤼순이 함락되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항해 후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만 했고, 이는 곧 대한 해협 및 쓰시마 해협,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오야 해협 세곳 중 한곳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연스럽게도, 이러한 항해 루트는 뤼순항 함락 후 재정비가 끝난 일본해군에게 포착될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 쓰시마 해전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뤼순 항 공략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군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피해가 컸다는 책임론이 불거졌으며, 오랫동안 그 책임론이 뒤집어씌워졌습니다. 특히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또한 그 자신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심적인 고통이 컸습니다. 결국 메이지 천황에게 자결하겠다는 청원을 했고, 절대 안된다며 반려되자 메이지 천황이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부가 함께 자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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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배우 또는 노안 배우로 친숙한 배우 우현이 군대를 꼭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사연이 있습니다. 그는 시민운동가이자 동문인 이한열 열사 사망사건 당시 가장 앞장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던 중 외신의 사진에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 속 우현은 강직한 표정과 짧게 자른 머리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그가 군대를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나왔지만 재학 중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옥살이만 두 번을 해서 소집제외되어 군면제를 받았습니다. 학번상 6월 항쟁의 선봉에 섰는데,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사건 항의 집회에서 최선봉에 섰기 때문에 미국 시사잡지의 1면 메인을 장식하게 된 것 입니다.

 

 

사실 우현은 외모와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병원장이었으며 어렸을 때 매일 소고기와 장어만 먹고 살았으며 아담한 100평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는 온수만 쓰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항상 300만원 정도의 현찰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학생운동 이후 90년대 신촌에서 '지리산'이라는 주점을 운영하였는데 당시 병맥주 전국 최저가로 알려져 있을 만큼 저렴한 술값의 주점이라 학생들, 특히 동문인 연세대학교의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찾던 술집이었고 사장인 우현을 비롯해 절친인 안내상도 자주 볼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장사가 잘 되기 시작하였는데 한 번은 겨울에 1주일 동안 집에도 안 가고 손님들과 같이 놀면서 큰 점퍼에 받은 술값들을 쑤셔넣으며 문닫을 때가 되면 그냥 술집에서 바로 자고 일어나 다시 장사하고 하면서 생활을 해봤는데 1주일 뒤에 주머니나 바지속(?) 등 곳곳을 뒤져서 돈을 꺼내자 500만 원이 넘게 돈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3년까지 운영하다가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 후 술집으로 번 돈을 연극 <라이어> 포함해서 연극 3편을 제작, 기획하면서 다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절친 배우 안내상과 연극 <라이어>로 데뷔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서른 다섯으로 배우치곤 상당히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단역으로 영화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 황산벌에도 출연하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매력을 드러낸 우현은 드라마에도 데뷔하여 계속해서 감초 역할로 활약했습니다. 특유의 노안과 작은 키 덕에 전형적인 동네 촌놈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최근에는 연기변신을 시도하면서 악역으로도 연기폭을 넓혔습니다. 특히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방지 역을 맡아 강채윤의 스승이자 노회한 무공의 고수역할로 젊은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2014년 3월부터
SBS 자기야 백년손님에 장모인 소설가 곽의진 씨와 같이 출연을 하여 좋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장모인 곽의진 씨가 타계 이후 하차하게 되었고 대신 2주간 추모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끌며 종영된 드라마'피고인'과 '사임당'에서 극과극의 빛나는 연기를 펼치며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피고인에서는 생명의 은인, 사임당에서는 배신자라는 전혀 다름 모습을 연기하며 큰 존재감을 과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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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푸에블로 함 피랍사건 이후 자신감을 가진 북한은 좀더 큰 도발을 행하기로 하고, 정기적으로 북한 영공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해가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을 격추하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EC-121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속도는 느리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성능의 레이다전자 장비를 갖추어, 이를 활용 북한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멀리 달아나곤 했습니다.

(EC-121)
일본 아츠기 해군기지에서 발진한 EC-121기는 동해를 통해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공군극동 공군이 포진한 블라디보스토크
를 정찰하고 이어 북한 쪽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이 EC-121를 노린 것은 북한 공군의 김책공군대학장 김기옥 소장이었습니다. 김기옥 소장은 북한에서는 6·25 전쟁 2차대전 때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미 공군 에이스 토마스 젤레스의 F-86 세이버 전투기를 격추한 조종사였습니다.

 

 

어랑비행장은 김책공군대학이 관할하는 공항으로, 이곳에는 속도가 느린 MiG-15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기옥은 평남 북창비행장에 있는 MiG-21기 두 대를 어랑비행장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MiG-21기가 자력으로 어랑비행장으로 날아오면 미 해군 정찰장비에 그 사실이 포착하고 경계하게 됨으로, MiG-21기를 분해해 야간 열차에 싣고 비밀리에 어랑비행장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어랑비행장에 대형 텐트를 쳐 미군 정찰장비의 첩보을 차단한 후, MiG-21기를 재조립했습니다. 그리고는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기약하며 1주일 남짓 EC-121이 날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969년 4월15일 북한 공군 레이더는 EC-121이 예상한 항로로 날아온 것을 포착했습니다. 김기옥은 즉시 두 대의 MiG-21기를 이륙시켜 바다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초저공 비행으로 EC-121의 예상 진행 항로 쪽으로 날아가게 했습니다.


물론 EC-121의 레이더는 어랑비행장을 이륙한 두 대의 비행기를 발견했을 테지만,이 당시에는 아무리 우수한 레이더일지라도 이 항공기가 MiG-21인지 MiG-15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EC-121 승무원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음속 전투기인 MiG-15라 생각하고, 별 대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그 21의 경우에는 마하 2까지 가속이 가능합니다)

 


MiG-21 2기는 초저공으로 바다에 붙어 EC-121 진행 항로로 접근하다가 갑자기 치솟아 EC-121로 돌진했습니다. 먼저 MiG-21 제1번기가 열추적 미사일 K-13을 발사했습니다. 열추적 미사일은 열이 많이 나오는 제트기를 쫓는데는 탁월하지만 EC-121 같이 열이 적게 나오는 프로펠러기는 놓칠 수도 있지만 거리가 가까웠던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조종사들은 안 되면 몸으로도 때우겠다는 심정으로 미사일이 맞지 않으면 공중 충돌을 해서라도 EC-121을 격추할 것을 결의했다고 합니다. 1번기가 최근 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하자, 이어 2번기 조종사인 현기수 대위가 K13을 발사하였고, EC-121는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청진 남동쪽 150㎞ 동해상에서 추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EC-121 승무원 31명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미국은 강력하게 대응하여,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USS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하여 40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71기동함대를 동해에 진입,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판문점에서는 공산측의 요청으로 290차 군사정전위가 긴박하고,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열렸으나, 미국의 응징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일, 주한미군기지에는 전술핵이 있었습니다.

 

(당시 EC-121를 격추시긴MiG-21)

격추작전에 동원된 북한군 MiG-21 2대는 이 공로로 '415 전투기' 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저 당시 미국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지금의 북한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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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steik 2017.05.15 21:00 신고

    궁금한점. 이기사는 많은데 왜어디에도 정찰기격추된곳이 부칸영공인지 안나오지?

 

군사력이란 병력화력 등의 물리적인 투사력, 첩보전 등의 정보적인 능력, 군수지원의 유지가 가능한 경제력, 외교력을 종합한 총체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말합니다. 각 나라의 군사력은 영토의 지형과 주변 환경에 따라 육군력과 해군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3면이 바다라 해군력이 더 막강해야 하지만 언제 3.8선을 넘어올지 모르는 북한군이 있기 때문에 육군력이 압도적으로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각 나라 군대들의 특별나게 강력한 무기에 대해 소개해보겠습니다.


 

1. 한국군

(포병,생화학무기,해병대)

 

한국군의 포병전력은 국방개혁 2020이 계획대로 끝난다면 K55 PIP와 K9, 신형 자주포 합쳐서 3,000문 정도 보유를 예상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MLRS 수를 보충한 다연장로켓을 국산화, 거기에 더해서 사단급으로 차륜식 다연장을 대충 성능은 MLRS급으로 갖추게 될 것 입니다. 오죽하면 국방부를 포방부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세계의 해병대 중 2위를 차지합니다. 사실 유독 해병대가 비대칭적으로 지나치게 대규모인 국가는 우리밖에 없는데 북한이라는 적국과의 휴전 대치 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 특성상 상륙작전 및 도서지역 방어, 해안선 방어 등으로 수요가 많던 해병대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화학 무기를 말하면 우리나라에 무슨 생화학 무기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군은 생화학 전력은 상당히 강력하며 북한 못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이 보유중인 생화학 병기들은 탄저균도 있습니다. 1997년 뉴욕타임스는 한국군이 세계 4번째의 생화학 무기를 보유, 생산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습니다. 현재 3,000t 정도의 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시에는 1만 2,000t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류는 신경성과 수포성, 혈액성, 구토, 최루성, 독성 물질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2. 러시아군

(핵무기,기갑부대,푸틴)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와 가장 많은 기갑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군대입니다. 현재 미국과 상호확증파괴가 가능한 엄청난 핵전력 덕분에 지금도 세계 2위의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신형 기갑장비의 등장은 러시아군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무인전차까지 확보하는 등 러시아의 계획은 엄청납니다. 강한 러시아를 향한 푸틴의 의지와 러시아 국민의 열망이 있는 한, 어떤 재정 상태에서도 러시아군의 현대화는 계속될 것이며, 미래의 기갑전력이 전장을 바꿀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러시아 연방의 전·현직 대통령이자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입니다. 푸틴은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이래 2017년에 이른 현재까지 총 18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집권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국민 대다수는 강경하고 거친 모습의 푸틴을 좋아하고 있으며 지지도는 대단히 높습니다. 2013년~2016년 4년 연속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그의 카리스마는 정말 엄청납니다.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푸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3. 일본군

(해군력,정보수집)

 

1954년 창설된 일본해상자위대는 45,800명의 병력과 110척의 군함, 357기의 항공기로 구성돼있으면 미국에 이어 전세계 2위에 해군력을 자랑합니다. 매년 기본으로 수상함 1척과 잠수함 1척을 건조하여 배치하고 있으며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자국에서 항공모함을 건조할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항모를 안만드는 것은 과거 전범국이었던 입장과 이에 따른 평화헌법 때문이었는데, 중국이 랴오닝급을 먼저 만들어 배치해버림으로서 그간의 일본항모 반대 논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항공모함이라고 볼 수 있는 헬기항공모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위성 정보수집 능력은 세계 최상급이며 이와 연계하여 아주 넓은 범위를 정밀하게 정찰이 가능한 지상의 인공위성이라 불리는 미군의 RQ-4 글로벌 호크까지 도입할 예정입니다.


 

4. 중국군

(병력,불법카피,핵무기)

 

중국군(인민해방군) 총병력은 230만명중에 육군 85만명, 해군 23만 5,000명, 공군 39만 8,000명이며 핵무기를 관할하는 제2포병은 제외된 숫자입니다. 그외에 정규군은 아니지만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 150만 명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핵탄두 수는 240기지만 미국 정보당국은 2020년대 중반 무렵에는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 탑재 가능 탄두 수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늘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중국 미사일부대인 제2포병의 DF-21에 대한 운용조직 구성은 불명확하고 복잡하지만, 핵과 재래식 부대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특기가 다른나라의 무기를 사다가 분해해서 불법으로 카피하는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불법 카피하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고 그렇게 기술을 가장 많이 도둑맞은 나라가 바로 러시아와 미국입니다. 우리나라 복합소총 K-11도 불법 카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점은 이러한 불법 카피로 인해 중국의 무기 개발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5. 북한군

(예비군,핵무기,막강한 권력)

 

북한군은 조선노동당의 군대라고 하지만 사실상 김정은의 사병입니다. 북한군보다 무서운 전력은 바로 준군사조직 예비군입니다. 북한군의 예비군은 교도대, 로농적위군, 붉은 청년근위대, 호위사령부 등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사실상 북한 예비군은 북한 전국민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한 이유로 북한은 구형무기들의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장기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핵무기 기술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고위급 핵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생산량 추정치가 미국이 예측했던 추정치를 훨씬 능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은 현재 핵탄두를 20기 이상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강력한 무기는 현재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최악의 독재자 김정은의 막강한 권력입니다. 김정은은 전세계에서 볼 수 없는 3대에 걸친 권력 세습이라는 현대사에 유례가 없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강력한 대북 강경책에도 북한은 '만약 미국이 이성을 잃고 우리를 선제타격하려는 사소한 움직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강력한 핵 타격 수단들로 침략과 도발의 본거지를 모조리 초토화해버릴 것'이라고 미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6. 이스라엘군

(특수부대,핵무기,여군)

 

이스라엘군은 어마어마한 실전경험과 효율적인 작전으로 명성이 높으며 미군들도 기량 면에선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특수부대들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시가전 분야에서는 미군, 러시아군과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숙련되었고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비록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이스라엘의 핵무장은 국제사회의 공공연한 사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무기급 핵물질의 규모는 핵탄두 100개 안팎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군이 강력한 점은 여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30%에 해당하고 있으며, 장성급도 약 15%로, 각 분야에 배출되고 있습니다. 연령이 18세가 되면 당연히 군대에 입대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준비를 하는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7. 미군

(인류 역사상 최강의 군대)

 

미군은 세계를 통틀어봐도 예산,규모,화력,장비의 질,보급,물량등 군대가 필요한 모든면에서 역사상 최강입니다. 현대전의 핵심무기인 전투기, 폭격기, 항공모함, 전차, 공격헬기, 공격기, 수송기, 조기경보기 등등 여러 병기종류들 사이에서 각각 병기마다 최고성능으로 꼽히는 병기들은 모두 미군의 것입니다. 미군을 상대할 수 있는 군대는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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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판정을 받은 후 현저히 시력이 떨어져 갑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 그러나 그 고통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이동욱 씨는 2004년 망막 생소 변성증이라는 병을 진단받은 후 점차 시력을 잃기 시작해 2010년 법적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희망의 아이콘이 된 개그맨 이동욱씨의 이야기에 대해 소개합니다.

 

 

2004년 봄, 이동욱씨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연애 시절부터 야맹증이 심해서 불편함을 겪었던 터라 이동욱 씨 아내 김은숙 씨는 어느 햇살 좋은 날,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야맹증에 좋은 약을 처방받고 나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며 신혼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동욱씨 부부는 집으로 금방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이동욱씨는 책상에 엎드려 겁에 질린 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절규했고, 아내는 그런 이동욱씨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막 색소변성증' 눈의 망막 세포가 변해 바깥 시야가 좁아지면서 터널처럼 가운데 부분만 보이다가 점차 시력을 잃는 병입니다. 미국은 40만 명의 환자가 있고 일본은 6000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발병 원인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아 딱히 치료 방법도 없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약조차 명확하게 나온 게 없는 희귀병입니다.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그런 진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엔 이동욱씨에게 운명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이동욱씨는 수년이 흐르는 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지고 개그 그룹 '틴틴 파이브'의 멤버로 홍록기, 표인봉, 김경식, 이웅호 등과 함께 박수소리에 파묻혀 지냈던 날도 세월 속에 점점 잊혀졌습니다.

 

 

툭하면 시비 걸고 소리 지르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취하면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술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음 병을 진단받고 5년 동안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 지냈다고 합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인상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돈을 못 벌어 오고 술만 마시며 잠만 자는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참담한 현실을 참아내기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동욱씨 아내는 오히려 이왕이면 좋은 곳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라고 했고 늘 손에 용돈까지 쥐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내의 정성스러운 그 사랑 앞에 이동욱씨는 서서히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이동욱씨는 아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아내게엔 청력 상실이나 반신마비 등과 같은 후유증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동욱씨 부부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더 이상 원망해봤자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이동욱씨 아내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누워있으면서도 이동욱씨에게 시력이 남아있을 때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으니 여행을 다녀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병원 밖으로 나와 통곡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날 흘린 눈물을 통해 비로소 내가 남편 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동욱씨 아내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이동욱씨는 1급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동욱씨 사연을 들은 천안에 사는 40대 남성이 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동욱씨는 눈을 기증받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돌아오셨나요?"라는 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이동욱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눈을 기증하겠다는 그 남자는 '근육병' 환자였습니다. 사지를 못쓰는 오직 성한 곳이라고는 눈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분은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마저 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동우씨는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의 권리가 있다. 병을 고백하고 숨어있지 말고, 세상과 소통했으면 좋겠다. 비장애인들도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야 주변에 있는 장애인들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라고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동씨는 "소원이 있다면 단 5분 만이라도 딸 지우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는 예쁘다는 걸 보아서 알지만 딸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쁘게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라고 말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동욱씨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철인 3종 경기에 출전을 하기도 하고, 재즈가수로 변신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현재 SM엔터테이먼트 소속으로 소속사의 든든한 지원으로 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시소' 개봉(10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영화 '시소'는 앞만 못 보는 남자 이동우와 앞만 보는 남자 이재신의 운명 같은 만남과 따뜻한 우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 '시소(See-Saw)'라는 제목은 이동욱씨가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이동씨의 삶을 보면서 저 역시 좀 더 열심히 살고 주변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이동우씨 앞으로 좀 더 활발한 활동과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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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리공업(주) 최태섭 회장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서울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작은 사업을 하던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피난길을 준비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이 빌린 돈을 은행에 갚아야 할 기일이 된 것을 알고 돈을 준비해 은행에 갔습니다. 전쟁통에 사람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뭐든 챙겨서 떠나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반대로 돈을 들고 은행을 찾아간 것입니다.

 

 

은행 직원의 말에 남자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사실, 갚을 돈을 은행 직원에게 준다고 해서 그 돈을 은행 직원이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된다고 생각하는 마당인데... 그래도 갚으시게요?”
전쟁 통에 융자장부가 어디 있는 지도 모릅니다. 장부의 일부는 부산으로 보냈고, 일부는 분실됐습니다. 돈을 빌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갚지 않아도
“빌린 돈을 갚겠다고요? 

그는 돈이 든 가방을 열며 은행 직원을 불렀습니다. 은행 직원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여기 빌린 돈을 갚으러 왔습니다.”

"난리통에 내가 죽으면 돈을 갚지 못할 테지, 어서 받으십시오"

하지만 남자는 여러 생각 끝에 돈을 갚기로 결심하고 은행 직원에게 영수증에 돈을 받았다는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은행 직원은 남자의 뜻에 따라 돈을 받고 자신의 인감도장이 찍힌 영수증을 건네 주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남자는 가족들을 데리고 제주도에서 군납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선한 생선을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되어 갈수록 물량이 많아지자, 그는 원양어업에 뛰어들면서 원양어선 을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수중에는 큰 배를 살 만큼의 돈이나 담보물이 없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배를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은행을 찾아가 융자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은행에서는 전쟁이 막 끝난 후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융자는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융자 받기를 포기하고 은행 문을 나서려다가 문득 자신이 전쟁 중 피난길에 서울에서 갚은 은행 빚이 잘 정리되었는지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려 예전에 받은 영수증을 은행 직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장의 영수증이 모든 상황을 바꿔 놓았습니다.
 


영수증을 본 은행 직원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 바로 당신이군요. 피난 중에 빚을 갚은 사람이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정직함은 은행가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답니다.”
직원은 그를 은행장의 방으로 인도했고 은행장은
“당신처럼 진실하고 정직한 사업가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필요한 금액을 흔쾌히 융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융자받은 사업 자금과 은행권의 신용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땅에서 나는 원료로 국가 재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두명의 동업자와 의기투합해 1957년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그 해에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판유리를 한국 원료와 기술로 국내 최초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정직의 성품으로 한국의 존경 받는 경영자가 된 그가 바로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현 한글라스)의 설립자인 故 최태섭(崔泰涉·1910~1998) 회장입니다.  

 

 

故 최태섭은 직원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랐습니다 1969년 기업공개시 친인척의 지분이 10%가 넘지 않도록 했으며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습니다. 한국유리 노조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61년에 만들어졌지만, 회사 경영층과 큰 갈등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일용직의 점심식사비는 남겨두는 그를 보며 노조위원장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은 그것이 힘이든, 돈이든, 자식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즐겨했던 최 회장은 자신의 소신대로 기업 이윤의 20%는 사회에 환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남을 위해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이 얼마되지 않아도, 남을 돕는 데 자기가 가진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참된 부자다.” 1998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가 남긴 말 한 마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정직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각, 말, 행동을 거짓 없이 바르게 표현하여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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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는 전차를 2,400기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전세계 3위라는 막강한 기갑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적인 수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쟁 초기에 수많은 손실을 입어 부대가 붕괴되다시피 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는데 기갑연대는 국군 기갑부대의 선구자로서 후배들에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군 기갑부대의 시초가 되는 기갑연대의 초기 모습과 전선에서 용감하게 적과 맞섰던 전투,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국군이 세계적 수준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게 되기까지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  역사의 시작

 

한국전쟁 직전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국군 유일의 기계화장비 완비부대인 장갑대대였습니다. 당시 국군의 모든 대대급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장갑대대의 주력은 M-8 정찰 장갑차 27대와 그 보조전력으로 M-2/M-3 반궤도 차량 24대, 정찰용 무장 짚차 20대였습니다. 기갑 부대를 전역한 예비역이나 현역 장병들이 들었다면 기가 찰 정도의 빈약한 장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우리나라 기갑 부대의 역사는 이렇게 빈약하게 출발하였습니다.


 

2.  통신용 전차 M-8

 

지금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통신강국이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M-8은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습니다.


 

3.  한국전쟁 발발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국군은 200여 대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하는 북한군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더이상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습니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습니다.


 

 

4.  북한 전차와 교전

 

의정부 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한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북한군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북한군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갔습니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북한군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국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했습니다.


 

5.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

 

이렇듯 개전 초기에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면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11월 29일 M-36 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은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를 보유한 진정한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년이 지난 1951년 10월 5일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 51, 제52 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6.  기갑부대 확장기

 

1954년 휴전이 성립되고 국군의 간절한 바램에 따라 본격적인 전차인 M-4를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았으며 유엔군이 대대적으로 철군을 단행한 1957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으로부터 총 388대의 셔먼전차를 도입하게 되면서 국군은 복격적인 기갑부대 확장기에 들어섰습니다. 당시 국군이 도입한 M-4 전차는 76mm 주포를 탑재한 M-4A3E형이었는데 비록 북한의 T-34전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평가는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전력이었습니다.


 

7.  월남전 그리고 기계화사단

 

국군의 대규모 월남전 파병과 1971년 한국에 주둔하던 미 7사단의 철수로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우고자 1971~1975년 사이에 한미 협의에 의해 국군 현대화 5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M-48A2C 전차 400여 대와 M-113 장갑차 400여 대를 미국이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모태로 해서 본격적인 국군의 기갑부대가 육성될 수 있습니다. 1973년 월남에서 철군 한 수도사단이 국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어지고 후속하여 제1기갑여단, 제2기갑여단이 창설됨으로써 기갑장비를 집중 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  성공적인 성능개조

 

1970년대 들어 더 이상 원조에 의존해서 자주국방을 이룰수가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그동안 이룬 경제개발을 바탕으로 우리 땅은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생각으로 자주국방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기갑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하였습니다. 이때가 우리 국군 기갑사에 새로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 4월 7일 신문 1면에 한국이 전차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에 사용하던 M-48 전차를 105mm 주포를 가진 M-48A5K로 성능개조를 하여 전력화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9.  최초의 국산전차 K-1

 

1970년대 말 우리 국군은 M-1 전차를 개발한 미국 크라이슬러 디펜스社의 도움을 받아 한국 지형에 맞는 전차 개발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장기간의 노력의 결과 시험 물량 출고와 테스트 후 1987년 9월 드디어 국민들 앞에 그 자랑스러운 최초의 한국형 국산전차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K-1 전차였습니다. 이후 계속 된 양산으로 약 1,000여 대의 K-1 전차가 국군에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공급되었고 1990년대 초부터 국군은 창군이래 계속된 대북 기갑전력의 열세를 질적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세계최강의 기갑세력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10.  세계 최고의 국산무기

 

그리고 2003년부터 정식 개발한 세계최고 수준의 K-2 흑표가 탄생하였고 최근에는 국산 자주포 K-9 48문을 핀란드와 수출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세계 시장에서의 우리 국산무기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수준의 국군의 기계화전력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며 창군 초기와 전쟁 당시의 피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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