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직후인 1918년 말엽 이후부터 승전국들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패전 국가들의 국가 해체와 국방력 약화, 새로운 국제질서 성립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즉각적이면서 실질적인 전리품으로서 승전 열강들이 탐내고 있던 것은 바로 독일 대양함대였습니다. 해전의 핵심이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이던 이 시기에, 독일이 보유한 온갖 종류의 전함들은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습니다.

 

 

6개월여 기간이 지나 종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협상 내용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독일 대양함대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각각 나눠갖기로 합의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열성적이었는데, 전쟁 전에 만들어둔 주력함 70만톤 계획안이 전쟁으로 파탄난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의 자존심은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의 막강한 수상함대 전력을 보유한 독일 해군은 승전국인 영국의 지시로 주력함대를 영국 본토 북단의 천혜의 군항 스캐퍼플로(Scapa Flow)로 이동시켰습니다. 독일 대양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루트비히 폰 로이터(Ludwig von Reuter) 제독은 영국 함대의 눈을 피해가며 억류된 모든 함정들에게 자침 준비를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21일, 스캐퍼플로의 영국 함대가 훈련을 위해 대대적으로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정대로 영국 함대가 출항하자 로이터 제독은 오전 10시 30분, Z 상황(자침)을 알리는 11호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수신한 독일 각 함의 잔존승무원들은 일제히 해수밸브를 열고 자침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국 함대는 급하게 스캐퍼플로로 돌아와 자침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배들은 해수가 가득 차서 해저에 착저하여 자침이 끝났거나 이미 해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단 몇 시간만에,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해군 함대가 자침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소멸했습니다.

 


침몰한 전함만
카이저급 전함 5척, 쾨니히급 전함 4척, 바이에른급 전함 2척 총 11척이며 모두 하나같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독일의 최신예함이었습니다. 특히 바이에른급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버금가는 15인치 주포를 탑재한 신예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서 그 당시에도 매우 아까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서
순양전함 5척, 순양함 8척과 구축함 50척도 같이 자침하면서 총 60여 척의 군함이 침몰하였고 그렇게 독일 대양함대는 소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분노를 안겼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해군은 대양함대의 치욕을 갚고자 가장 먼저 스캐퍼플로를 공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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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을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주만을 상기하라"(Remember Pearl Harbor)는 절규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고, 복수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전국의 모병소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 속에 아이오와주 워털루 출신의 설리반 5형제도 있었습니다. 설리번 형제들에게 진주만 습격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이들의 유일한 누이, 제느비에브의 약혼자 윌리엄 볼이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 아이오와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미 해군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는 맏형 조지(28), 차남 프랭크(26)와 삼남 조셉(23), 사남 매디슨(22), 그리고 막내인 알버트(20)까지 모두 해군에 자원 입대를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 해군 규정에는 가족은 같은 함정에 배치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맏형 조지는 해군 장관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함께였었고 함께 승리 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워싱턴의 해군성에서는 설리번 형제의 동반 입대가 멋진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 이를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2년 11월 13일 새벽, 과달카날 해전에서 설리번 5형제가 타고 있던 주노 함은 교전 도중 일본 해군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 중 1발에 뱃머리를 피격당했고, 수리를 위해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철수하던 도중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 탄약고가 대폭발, 침몰하였습니다. 철수하는 함대를 이끌던 후버 대령은 일본 잠수함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의 구조활동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주노의 구조를 포기하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그대로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가버렸습니다.

 

 

당시 주노에서는 100여명의 승조원이 탈출했지만, 구조가 늦어진 결과, 대다수가 기아, 탈수, 상어의 공격으로 인해 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자들 중에 설리번 5형제가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3명은 폭발에 의해 즉사, 막내인 앨은 다음날 익사했고, 맏형 조지는 며칠 후 구명보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설리번 5형제 아버지와 어머니)

결국 약 8일 후 형제를 제외하고 구조된 생존자는 약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주노의 격침과 대규모 인명피해를 보고 받은 헐지 제독은 그 책임을 물어 후버 대령을 직위해제시켰습니다. 설리번 부모는 전사통보를 받지 못하고 단지 미 해군이 교전으로 인해 많은 함정이 침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들어 해군측에 물어보았지만 M.I.A.(Missing In Action, 교전 중 실종)통보만을 받고, 나중에야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쓴 전사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후에 설리번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미 군함의 이름으로 '설리번 형제'(The Sullivans)가 붙게 되었습니다. 초대 USS 설리번 형제는 플레처급 구축함 DD-537로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65년에 퇴역하여 보존함 처리되었습니다. 2대 USS 설리번 형제는 알레이버크급
DDG-68로 1997년에 취역하여 아직 현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은 한 형제의 같은 부대나 함정의 근무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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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일본군은 러시아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군홋카이도를 거쳐 혼슈 북부로 침공함을 막는 방어작전이었습니다. 일본 육군 8사단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물자 보급선을 확보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8사단은 아오모리에 주둔한 5연대 2대대에 동계 산악행군을 겸한 보급로 탐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하되 1대대와 3대대에서 병력을 약간 차출하여 최종적으로 210명의 병력이 차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에 임하면서 전 병력에게 혹한을 대비하도록 했는데 발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양말을 3겹으로 신게 했습니다. 그리고 210명의 병력이 1902년 1월 23일 목요일 아침 7시경 부대를 출발했습니다. 행군 초반에는 여정이 매우 순조로웠고 날씨도 혹한기 산악훈련을 하기 적절한 추위 정도였기에 순조롭게 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오후부터 급격하게 기상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산 중턱 가까이까지 올라갔는데 급격하게 추워지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지휘관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고민끝에 일단 계속 가보자는 최악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눈은 계속 더 쏟아지고 밤이 될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으며,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던 비상식량도 다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나 지휘부는 야간행군을 강행했습니다. 폭설과 혹한 속에서 제대로 된 보온조치 없이 휴식하고 수면을 취하다간 숙영지를 공동묘지로 만들 뿐이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지휘부는 고민 끝에 복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눈이 하도 와서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길을 찾지 못한 부대는 부대원 다수가 동사할 것임을 알면서도 개활지 한 곳을 잡아 임시 숙영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땅은 얼어붙었고 공구를 지닌 병사들은 다수가 낙오하여 그나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의 체감 온도는 무려 영하 50도에 달했고 결국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5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지휘관은 이날 아침 그나마 체력이 남았다고 판단된 병력을 특무조장 2명을 포함한 12명을 선발하여 2개 조로 척후대를 편성, 각 특무조장을 척후대장으로 임명한 후 선발로 내보냈습니다. 이들 척후대 중 1개 조는 이후 연락두절, 전원 동사했으며 다른 1개 조는 길은 찾아내었으나 민간인이나 마을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은 생존자들도
거의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대원 210명 중 60~70명밖에 남지않은 상황이였습니다. 그리고 1월 26일 한명이 구조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어 구조되었지만 이미 훈련에 참가했던 210명 중 199명이 추운 혹한의 날씨에 사망한 후 였습니다. 이 사건은 평시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서는, 생존률이 고작 5%에 불과한 이례적인 대규모 참사였습니다.

 

 

그 후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치 산을 행군하는 듯한 군인들의 모습이 목격되고 군인들의 군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미스터리한 사망사건들이 발생하는 등 핫코다산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사고가 계속됐습니다.

 

 

사람들은 핫코다산에서의 죽음을 동사한 군인들의 원혼으로 여겼고, 핫코다산을 '저주받은 산'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해가 지면 핫코다산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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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갈부대... 후덜덜하네요..;;
    체감 50도면... 역시.. 사람이 버틸수 있는...온도가
    아니니깐..ㅠ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