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이스라엘이 미사일 방어(MD) 시스템 개발에 착수한 것은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은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부터입니다.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독자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한편 미국과 협정을 맺어 기술과 자금 지원을 얻었으며 다윗·애로우 모두 미국과 공동 개발하게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미국에 중동 지역 거점용 군사기지를 제공하였으며 일본·폴란드·카타르 등과 함께 미국의 사드 레이더도 배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3단계로 이루어진 현존 세계 최강의 미사일 방어(MD)시스템을 잠시 살펴보면 첫번째로 아이언 돔이 있습니다.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 영토 전체를 둥근 지붕 형태의 방공망으로 둘러싸는 저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입니다. 사거리 4∼70㎞ 내의 단거리 미사일, 로켓 등에 대한 방어 무기로 분당 최대 1천200개의 표적을 요격할 수 있습니다. 탐지에서부터 격추까지 불과 15∼25초밖에 걸리지 않으며 특히 2014년 여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의 전투에서 4천여 발의 로켓과 박격포탄 90%를 요격하는 탁월한 성능을 입증했습니다.

 

 

이런 아이언 돔보다 높은 고도의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2016년 3월에 배치된 마법의 지팡이(Magic Wand)로도 알려진 다윗입니다. 최대 296km 거리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시스템으로 최고 요격고도는 40km입니다. 최고속도 마하 6의 속도로 적의 로켓포, 항공기, 순항 미사일은 물론 탄도미사일, 유도미사일까지 모두 요격이 가능합니다. 적외선 이미지 및 RF 탐지기를 이용하는 이중 추적장치로 악천후에도 높은 요격률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미사일 방어 끝판왕 애로우는 요격거리 120km 최고 요격고도 200km를 자랑합니다. 4~8개의 수직 미사일 발사대(24~28기 미사일)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2017년 3월 시라이 폭격을 마치고 귀환중이던 이스라엘 공군 F-15전투기를 격추하려는 시리아군의 러시아제 SA-5 지대공 미사일을 요격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이란의 사거리 2000㎞짜리 탄도미사일,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와 하마스 등의 중·단거리 미사일과 로켓포 등의 공격에 전 국토가 노출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위협을 방치하지 않고 노력해 결국 단단하고 완벽한 현존 최강의 자체 방어력을 갖춘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때가 90년대 중반입니다. 이미 그때부터 북한이 우리를 어떻게 위협할지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긴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고 이제야 방어망을 만든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군 가진 것은 미국서 사온 최대 요격 고도 15㎞ PAC-2 패트리엇뿐입니다. 내년부터 들여올 PAC-3와 자체 개발한 천궁도 20㎞ 정도에 불과하고 개발 중인 L-SAM도 최대 60㎞입니다. 고각 발사되는 북한군의 무수단·노동미사일을 막을 수단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국방비는 160억달러(2015년 기준)로 우리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사일 방어력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은 국민이 똘똘 뭉쳐 미사일 방어에 수십년을 달려왔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는 북한의 미사일을 바라보며 정치 싸움만 해왔습니다. 원래 PAC-3를 들여오려 했으나 미국 MD에 편입될 우려가 있다고 일부러 성능이 떨어지는 PAC-2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뒤늦게 개조한다고 1조원을 낭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 다층 미사일 방어체계를 모두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사드 배치 하나만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 전술핵무기 재배치나 핵무장 등에서부터 ‘중국과의 대화’까지 모두 ‘사드’와 ‘중국’, 그리고 ‘북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2025년까지 킬 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계획을 완성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600발에 달하는 북한 탄도미사일과 한반도를 노리고 있는 중국의 핵미사일 수백여 발을 막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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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스라엘 마사일 방어체계도 한번 생각해볼만하네요..
    사드배치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필요성을 잘 검토하고 방어체계를 어떻게
    잘구축할 수 있는지 큰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겠네요..
    좋은 포스팅 잘봤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직후인 1918년 말엽 이후부터 승전국들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패전 국가들의 국가 해체와 국방력 약화, 새로운 국제질서 성립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즉각적이면서 실질적인 전리품으로서 승전 열강들이 탐내고 있던 것은 바로 독일 대양함대였습니다. 해전의 핵심이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이던 이 시기에, 독일이 보유한 온갖 종류의 전함들은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습니다.

 

 

6개월여 기간이 지나 종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협상 내용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독일 대양함대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각각 나눠갖기로 합의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열성적이었는데, 전쟁 전에 만들어둔 주력함 70만톤 계획안이 전쟁으로 파탄난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의 자존심은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의 막강한 수상함대 전력을 보유한 독일 해군은 승전국인 영국의 지시로 주력함대를 영국 본토 북단의 천혜의 군항 스캐퍼플로(Scapa Flow)로 이동시켰습니다. 독일 대양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루트비히 폰 로이터(Ludwig von Reuter) 제독은 영국 함대의 눈을 피해가며 억류된 모든 함정들에게 자침 준비를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21일, 스캐퍼플로의 영국 함대가 훈련을 위해 대대적으로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정대로 영국 함대가 출항하자 로이터 제독은 오전 10시 30분, Z 상황(자침)을 알리는 11호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수신한 독일 각 함의 잔존승무원들은 일제히 해수밸브를 열고 자침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국 함대는 급하게 스캐퍼플로로 돌아와 자침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배들은 해수가 가득 차서 해저에 착저하여 자침이 끝났거나 이미 해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단 몇 시간만에,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해군 함대가 자침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소멸했습니다.

 


침몰한 전함만
카이저급 전함 5척, 쾨니히급 전함 4척, 바이에른급 전함 2척 총 11척이며 모두 하나같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독일의 최신예함이었습니다. 특히 바이에른급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버금가는 15인치 주포를 탑재한 신예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서 그 당시에도 매우 아까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서
순양전함 5척, 순양함 8척과 구축함 50척도 같이 자침하면서 총 60여 척의 군함이 침몰하였고 그렇게 독일 대양함대는 소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분노를 안겼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해군은 대양함대의 치욕을 갚고자 가장 먼저 스캐퍼플로를 공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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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을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주만을 상기하라"(Remember Pearl Harbor)는 절규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고, 복수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전국의 모병소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 속에 아이오와주 워털루 출신의 설리반 5형제도 있었습니다. 설리번 형제들에게 진주만 습격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이들의 유일한 누이, 제느비에브의 약혼자 윌리엄 볼이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 아이오와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미 해군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는 맏형 조지(28), 차남 프랭크(26)와 삼남 조셉(23), 사남 매디슨(22), 그리고 막내인 알버트(20)까지 모두 해군에 자원 입대를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 해군 규정에는 가족은 같은 함정에 배치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맏형 조지는 해군 장관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함께였었고 함께 승리 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워싱턴의 해군성에서는 설리번 형제의 동반 입대가 멋진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 이를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2년 11월 13일 새벽, 과달카날 해전에서 설리번 5형제가 타고 있던 주노 함은 교전 도중 일본 해군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 중 1발에 뱃머리를 피격당했고, 수리를 위해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철수하던 도중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 탄약고가 대폭발, 침몰하였습니다. 철수하는 함대를 이끌던 후버 대령은 일본 잠수함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의 구조활동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주노의 구조를 포기하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그대로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가버렸습니다.

 

 

당시 주노에서는 100여명의 승조원이 탈출했지만, 구조가 늦어진 결과, 대다수가 기아, 탈수, 상어의 공격으로 인해 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자들 중에 설리번 5형제가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3명은 폭발에 의해 즉사, 막내인 앨은 다음날 익사했고, 맏형 조지는 며칠 후 구명보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설리번 5형제 아버지와 어머니)

결국 약 8일 후 형제를 제외하고 구조된 생존자는 약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주노의 격침과 대규모 인명피해를 보고 받은 헐지 제독은 그 책임을 물어 후버 대령을 직위해제시켰습니다. 설리번 부모는 전사통보를 받지 못하고 단지 미 해군이 교전으로 인해 많은 함정이 침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들어 해군측에 물어보았지만 M.I.A.(Missing In Action, 교전 중 실종)통보만을 받고, 나중에야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쓴 전사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후에 설리번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미 군함의 이름으로 '설리번 형제'(The Sullivans)가 붙게 되었습니다. 초대 USS 설리번 형제는 플레처급 구축함 DD-537로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65년에 퇴역하여 보존함 처리되었습니다. 2대 USS 설리번 형제는 알레이버크급
DDG-68로 1997년에 취역하여 아직 현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은 한 형제의 같은 부대나 함정의 근무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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